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는 나이가 많은 ‘늙은 소’ 한 마리가 있었다. 일은 잘 하지만 성격이 난폭하고 코가 세서 나한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 소였다. 그 시절에는 촌 동네 아이들이 학교를 갔다 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가 ‘소 먹이’를 가는 일이었다. ‘소 먹이’는 소를 산으로 몰고 가서 풀을 뜯어 먹게 하는 일을 말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소죽을 끓여 먹이면서도 오후에는 반드시 ‘소 먹이’를 가야만 했다.
촌놈들에게는 ‘소 먹이’ 행사가 ‘일’이기도 했지만 ‘놀이’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집 늙은 소를 몰고 ‘소 먹이’를 가는 일은 어린 나에게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이유는 그 놈의 늙은 소가 ‘귀신’이었기 때문이다. 소를 몰고 산으로 가자면 가는 길목에 대부분 소들이 좋아하는 콩 밭이나 고구마 밭을 거쳐야 하는데 우리 집 늙은 소는 그 밭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코뚜레를 했지만 단련이 되어서 코가 세진 늙다리는 ‘꼬마 목동’을 무시라도 하듯 그냥 콩 밭으로 돌진해서 남의 밭 귀한 콩을 마구 뜯어먹곤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산에 가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게 방목을 해놓고 꼬마 목동들은 병정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나는 그 때도 좌불안석이었다. 우리 집 늙다리는 어느 산에 가면 어느 위치에 맛있는 콩 밭이나 고구마 밭이 있다는 걸 귀신 같이 다 알고 있어서 재미있게 놀다가도 밭주인에게 벌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 ‘귀신 소’에게서 인간미가 느껴지는 감동적인 추억도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역시 초등학교 시절, 11살 많은 형님과 함께 땔감을 해서 소 등에 질매를 지워 집으로 오는데 우리 집 ‘귀신 소’가 잘 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알고 보니 등에 짊어진 짐이 균형을 잃고 한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철없는 어린 소 같으면 짐을 벗기 위해 오히려 몸부림을 쳤을 텐데 늙다리는 짐이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걸음을 멈췄던 것이다. 얼마나 기특한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부터 이유 없이 죽을 먹지 않고 눈물만 계속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어른들이 장날 소를 팔아야겠다는 말을 한 것을 듣고 일종의 ‘데모’를 한 것. 가축도 생각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 집 늙다리 ‘귀신 소’의 경우를 보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당시로서는 꼬마 목동에게는 버거운 상대로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 집 늙다리 ‘귀신 소’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뿔은 양쪽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구부러져 괴팍한 성질을 상징했고, 얼굴은 까무잡잡한 것이 고집불통으로 보였던 그 늙다리. 그러나 그 놈이 어린 시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에겐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귀신 소’가 요즘은 ‘미친 소’가 되어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인공적으로 키우는 소가 광우병에 걸려 인간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우병, 사스, AI 등은 모두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게 해야 할 동물을 인간이 억지로 가두어 놓고 인위적으로 키움으로써 스트레스를 받은 동물들이 몹쓸 병에 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로 전염되는 병이다. 인류가 만들어 낸 자업자득의 재앙이다.
최근 광우병으로 중단됐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축산농가는 이제 줄 도산이 불을 보듯 뻔하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고, 소비자들은 말은 않지만 값싼 쇠고기를 먹을 수 있게 돼 반기는 분위기다. 게다가 AI사태는 진정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축산농가이든 소비자이든 이번 기회에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 있다. ‘미친 소’나 ‘AI’가 과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인류문명의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면 네 탓 내 탓을 따질 때가 아니다. 모두가 반성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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