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가출을 결심한 적이 있다. 뭘 잘못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형님한테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집을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혼자 야심한 밤에 눈물을 찔찔 짜며 가족과 이별하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간밤에 썼던 편지를 읽었다. 내가 써놓고도 민망할 정도였다. 굳은 결심으로 썼던 작별편지는 그래서 내 손에 의해 찢겨지고 가출도 포기했다.
이처럼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쓴 글을 흥분이 가라앉고 평상심을 찾았을 때 읽어보면 가관이 아니다. 식품안전관리와 관련된 정부의 정책들 중에도 밤에 쓴 연애편지와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일시적인 식품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여론몰이에 의해 졸속으로 추진된 정책들이다. 말하자면 이성적이기보다는 지극히 감성적인,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만들어진 정책들이다. 흥분상태가 가라앉은 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뭔가 잘못된, 이상한 정책들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배추김치의 HACCP 의무화와 학교급식의 강제 직영전환이다.
우선 배추김치의 HACCP 의무화 정책부터 보자. 이 정책은 2005년에 발생한 김치 기생충 알 검출 사건이 계기가 됐다. 2005년 11월 3일 배추김치 제조·신고업체 502개 제품에 대한 검사결과 16개 업체 제품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됐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11월 8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원료의 구입부터 제품의 생산까지 체계적인 위생관리를 위해 배추김치 HACCP 적용 의무화를 추진키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난 4월 28일 배추김치 HACCP 의무적용 대상과 시행시기 등을 확정하고 이를 고시했다.
고시가 발표되자 김치업체들은 기생충 알 사건에 이어 2차 도산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식약청 고시는 연매출액과 종업원 수를 기준으로 4단계로 구분, 단계적으로 시행하도록 돼 있으나 2010년 12월까지만 도입하면 되는 2단계 적용 업체들까지도 벌써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업체의 경우 그동안 거래하던 H중공업에서 HACCP를 도입하지 않으면 납품을 받지 않겠다고 압박하고 있고, B업체의 경우 최근 학교급식 입찰자격이 HACCP시설 적용대상자로 한정돼 그동안 납품해오던 학교에조차 입찰참가 기회마저 잃어버렸다고 호소하고 있다.
김치는 발효식품이다. 전 세계적으로 천연발효식품의 제조공정에 HACCP를 적용하고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고 HACCP를 의무적으로 적용하도록 한 것은 그야말로 전시행정이다. 김치의 기생충 알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조사나 발표가 지금까지 한 건도 없기도 하지만 HACCP를 적용한다고 해서 기생충 알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또 김치는 전통식품으로서 이미 전통식품 품질인증제도에 따라 HACCP에 못지않은 안전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굳이 영세업체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주면서까지 HACCP를 무리하게 적용하는 것은 전통식품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꼴이다.
학교급식의 강제 직영 전환도 마찬가지다. 2006년 여름 모 위탁급식업체가 운영하던 학교급식 현장에서 대형 식중독 사고가 발생하자 그해 말 교육당국은 2009년까지 위탁으로 운영 중인 학교급식을 모두 직영으로 전환하도록 학교급식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났지만 직영으로 전환하는 실적은 지지부진하고, 심지어는 국공립학교의 교장들이 위탁급식을 계속할 수 있도록 법을 재개정해달라고 하소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시적인 사고로 인해 흥분된 상태, 시민단체와 언론 등에 의한 마녀사녀식의 여론 몰이에 의해 졸속으로 추진된 정책은 밤에 쓴 연애편지와 같다. 시간이 지나고 평상심으로 돌아가면 오버 액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걸 아는 순간 원점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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