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근본철학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응징함으로써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평화롭고 즐거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들은 인생을 제대로 살게 해주는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는 진지하게, 누구는 슬픈 언어로, 또 다른 누구는 해학적으로 표현하지만 어느 누구나 작가는 작품을 통해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
그러 하기에 정신적 풍요를 원한다면, 그래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문학과 예술작품을 많이 접하는 것이 좋다. 어쩌면 그것은 인생을 살면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항목인지도 모른다.
11월 1일 토요일 오후, 강화도 어느 고즈넉한 시골에 자리 잡은 육필문학관. 그곳에서 우리 회사 전 직원의 백일장이 열렸다. 시를 직접 지어 낭송을 했다. 어느 직원은 강화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고, 어떤 직원은 오래전 강화도에 대한 추억을 꺼내 놨고, 어떤 여직원은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고 강화도에 묻힌 오빠를 그리워했다. 첫 아이의 아빠가 된 남자직원은 아이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고, 마땅한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은 직원은 자신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거나 유명 시인의 작품을 낭송하기도 했다.
아름답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직원들은 직접 시를 지어보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평소 하지 않던 짓거리를 하자니 스트레스를 풀러 간 여행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원고지에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고, 그것을 발표할 때는 모두가 시인이었다. 심사를 하고 평가를 해준 육필문학관 관장도 그런 우리 회사 직원들을 보고 마치 평소에 작품 활동을 하는 문학 동아리를 보는 느낌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시를 직접 지어보고 작가들이 지어놓은 시를 낭송한다는 것은 주문(呪文)을 읊는 것과 같다.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바쁜 일상사 속에서도 한 권의 시집을 옆에 두고 습관처럼 시를 접하고, 시심(詩心)을 갖고 습작 활동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자신의 정신적 삶이 풍요로워지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신세계가 풍요로워지면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학과 예술작품을 많이 접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나아가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시는 ‘인간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이고, 소설은 ‘진리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라는 미완의 ‘도화지’에 색칠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인생)을 그리기 위해서 말이다.
최근 국회의원들이 국회연설에서도 시를 인용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지난 10월 28일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대표연설에서 “아무리 높이 솟아 있어도/홀로선 돌을 탑이라 하지 않는다/셋이서 다섯이서/받쳐주며 높아질 때 탑이 된다”고 읊었다고 한다. 이정란 시인의 ‘돌탑’ 첫 부분인데 각종 입법을 앞두고 야당의 협조를 구한다는 뜻으로 인용했단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3일 대정부 질문에서 ‘돌탑’의 후반부를 인용했다. “돌탑이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건/돌과 힘/힘과 돌 틈으로/화기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면서 정부가 화기를 보내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말’이 곧 ‘정치’인 정치권에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노력이 신선하다.
깊어가는 가을, 잠자고 있는 시심을 깨워 영혼의 살을 찌워 보는 것은 어떨까. 힘들고 어려워 괴롭다면 그 북받쳐 오르는 괴로움을 발산시켜보라. 마음이 후련하고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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