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경제(山林經濟)와 홍만선(洪萬選)의 고민
산림경제(山林經濟)와 홍만선(洪萬選)의 고민
  • 식품외식경제
  • 승인 2016.12.0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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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영 한국식품연구원 前원장, 한국식품건강소통학회 회장
▲ 권대영 한국식품연구원 前원장, 한국식품건강소통학회 회장

조선 후기 홍만선(洪萬選)(1643~1715)은 농림축잠업을 망라했을 뿐 아니라, 가정생활에 관련되는 주택·건강·의료·취미·흉년대비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림살이에 대해 종합적인 책을 서술하고 그 책의 이름을 산림경제(山林經濟)라고 명명했다.

일반적으로 우리 역사와 인문학을 연구한다는 학자는 흔히 한자를 조금 안다는 사람들이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한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이 한자를 갖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한자 중심으로 하고 다니면서 그럴 듯 해 보이는 말을 하면 자연과학자들은 그들의 영역을 존중하고 그들의 영역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인문학 관련자는 지나치게 비과학적인 경우가 있다. 가끔 자연현상이나 인류발달의 기본원리를 망각하고 오로지 한자의 기록에만 얽매여 생각하다 보니 진실을 보지 않고 언어의 유희와 학문의 장난의 영역에 들어가 진리를 왜곡해 전체 학문의 발달에 심히 우려되는 경우가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조화는 학문 발달에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인문학자들이 지나치게 자기 영역에 함몰되다 보면 자연과학적인 데이터가 나오더라도 승복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렇게 되면 궤변에 빠지고 성역의 둘레를 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소통이 잘 안 된다.

한자를 안다는 것과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다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자를 아는 사람은 배운 사람,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의 등식이 1970년대 이전까지 적용됐다. 이는 해방 후 영어를 안다고 하면 배운 사람이고 영어를 모르면 못 배운 사람의 등식을 씌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안다는 것과 학문적 진리를 아는 것과 아무 등식이 성립하지 아니하듯이 한자를 안다고 해서 진실을 아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다만 필요조건은 될 수 있다. 오히려 한자로 기록된 책을 이해하는데 한자에 집착하다 보면 진리와 더 멀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 우리말을 기록했을까? 고민하는 것이 진리에 더 접근할 수 있다. 한자가 중국 이외 국가에게 그 나라의 말과 소리를 표기하기에는 적합한 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한자에 얽매어 학자들이 우리글을 왜곡하는 경우가 흔히 나타난다. 홍만선의 산림경제는 산림경제의 한자 의미인 Forestry Economy(山林經濟)에만 관한 책이 아니다. 물론 소위 임학(林學)에 대해 나오기도 하지만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 당시의 농어업, 식생활, 식치, 구충까지 살림살이(생활경제)에 관한 책이다.

즉 온갖 살림살이에 관한 책인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자의 표기에만 얽매여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학자가 생겨나기도 한다. 즉 “산림(山林)은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자족하는 삶을 이르며 그 산림에 거처하는 생활을 산거(山居)라 표현한다”(김일권, 조선 최초의 생활백과전서 산림경제와 우리말 살림사상의 성립, 철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고 해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의 삶과 연관이 있는 ‘살림살이’라는 말이 山林에서 왔고 그 근거는 山林經濟이다.

얼마나 우리말이 한자에 의해 희롱당하고 진실이 왜곡되고 있는가? 홍만선도 우리말로 ‘살림經濟’이라고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글은 업신여겨졌던 풍토였기 때문에 많은 고민 끝에 살림을 山林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우리글이 있었음에도 김치를 굳이 ‘沈菜’라고 표기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자들 때문에 수천년 된 김치나 역사가 수백년으로 줄어들고 닭도리탕이 일제 강점기 음식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비빔밥이 1800년대 음식으로 치부돼 역사가 훼손되고 있다. 우리말은 우랄 알타이어족으로 중국과 전연 다른 어족이다. 우리 선조들이 우리말을 어떻게 기록할까 수없이 고민 했던 것을 너무 쉽게 폄훼하고 있다.

언어의 유희에 진실이 왜곡되고 함부로 비과학적인 말을 만드는 것이 인문학자의 할 일이 아니다. 글은 사실을 표현하고 기록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실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며 학자의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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