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와 오븐 청소부
변호사와 오븐 청소부
  • 식품외식경제
  • 승인 2019.01.3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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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 배선경 변호사

수년전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그리스 섬을 한 달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리스 섬을 여행하는데 최적기는 9월이다. 8월 여름 성수기보다 방값은 반값으로 내려가고, 태양은 뜨겁지만 기온은 쾌적하다. 10월 중순이 되면 식당과 호텔들이 하나둘씩 영업을 중단하기 시작하고, 11월 초에는 거의 모든 업소들이 문을 닫고, 여름 동안 번 돈으로 따듯한 나라에 가서 몸을 덥히며 쉰다. 

그리스 미코노스 섬의 호텔에서 스케치 여행을 온 50대의 영국 아저씨와 말문을 트게 됐다. 작은 호텔이고, 비수기에 접어들어 투숙객이 별로 없는 지라 쉽게 얘기를 나누게 됐고, 한가한 오후에 호텔 정원에서 티타임을 함께 했다. 
이름은 다니엘이고, 직업은 오븐 청소부라고 했다. 오븐을 청소하는 직업이라니... 디킨슨의 소설에 나오는 굴뚝 청소부라는 직업은 들어 봤지만, 오븐 청소부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신기한 직업사전’이 있다면 수록될만한 직업이 아닌가. 


오븐청소부의 예전 직업은 변호사

놀랍게도 다니엘의 예전 직업은 변호사였다. 영연방 국가에는 두 종류의 변호사가 있는데, solicitor와 baristor이다. 전자는 주로 서면업무를 보고, 후자는 전자가 작성한 서면을 근거로 법정에서 변론한다. 

다니엘은 잘 나가는 사무변호사(solicitor)였는데, 40대 후반 갑자기 공황장애가 왔다고 한다. 패닉이 오는 순간엔 반드시 부인이 옆에 있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발작이 일어났다. 그래서 몇 년간은 부인이 다니엘의 옆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변호사 업무를 도와주다가, 증상이 점점 심해져 변호사 업무를 접고 은퇴해서 집에서 지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집을 방문한 오븐청소부가 오븐을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 정도의 일이라면 나도 한번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오븐을 청소하는 일은 몸을 쓰고 단순해서 즐겁고 스트레스도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서(오븐 청소부도 스트레스가 있나 보다), 지금은 오븐청소도 하고 그림도 그리면서 인생을 즐겁게 산다고 했다. 미코노스 섬에도 스케치 여행을 온 것이랬다. 
변호사란 직업은 정신적으로 지치고 소진되기 쉽다. 나와 그리고 의뢰인을 위해서는 일정한 에너지 레벨을 유지해야 하는데, 워낙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재판 등의 업무는 상대방과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적인 파이팅 모드를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어 번아웃증후군에 취약하다. 


누구나 찾아오는 한계를 경계·관리해야

12월 마지막 주는 법원의 휴정기라서 재판이 없었다. 좀 쉬면서 재충전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인지 한 주를 꼬박 앓았다. 아프면서도 휴정기에 아파서 재판 일정에 아무 영향도 없는 게 내심 감사하고 안도감이 들었다. 재판이 많을 때 아팠으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일이 지나치게 많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미크노스 섬에서 만난 다니엘이 떠오른다. 인간의 정신은 강하면서도 약한 구석이 있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고, 그 한계를 한번 넘으면 돌아오기 힘들다. 자신의 한계를 경계하고 관리하는 것도 프로페셔널의 능력이다. 

내가 건강해야 의뢰인도 도울 수 있다. 올 한해는 나와 의뢰인을 위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최상으로 관리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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