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우유 역사 새로 쓰는 서울우유
국내 우유 역사 새로 쓰는 서울우유
  • 관리자
  • 승인 2007.07.05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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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동안 유업계 1위 차지
국내 우유시장의 38%를 차지하며 지난해 1조 772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지난 70년 동안 유업계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서울우유.

서울우유는 올해 초 창립 70주년을 맞아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비전 선포식을 갖고 2017년까지 매출 3조원을 달성해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유가공&서비스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동시에 종합 식품, 서비스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땅의 우유 역사를 쓰고 있는 서울우유의 창립 70주년을 맞아 서울우유의 발자취를 재조명해봤다.

△경성우유동업조합 시대=일본에서는 1930년대 전근대적 우유공장인 밀크프란트 건설이 본격화되기 시작, 1933년 삿보로에 최초로 건설된 밀크프란트가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본에서 급속하게 확산되는 근대적 우유 공장은 국내에도 영향을 줘 경성우유동업조합이 1938년 7월 11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 573호로 설립인가가 났다.

조합의 위치는 정동으로 고종이 1919년 함녕전에서 일본 측의 독살 의혹을 남기며 세상을 뜨자 일본은 궁궐 훼손을 의도적으로 진행, 대부분의 건물을 철거하며 1922년에는 남북으로 길을 내고 학교 방송국 등도 세웠다. 일부 부지는 1933년 불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동길과 새로 생긴 길 사이에 경성우유공장이 건립된 것이다.

정동이 우유공장부지로 선정된 것은 일본인 집단 거류지가 충무로 일대여서 배달이 수월하며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덕수궁 앞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유도 있지만 일본이 덕수궁이나 경복궁, 창경궁 등 우리 민족 자존심의 훼손이라는 정치적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경성우유동업조합의 설립으로 목장에서 우유를 자체 처리해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우유는 오로지 경성우유판매조합을 거치게 하는 우유 판매 독점제를 실시했다. 이 역시 일본이 국내 낙농산업을 한손으로 좌지우지하기 위함이다.

또한 경성우유 정동공장이 가동되고 있던 당시는 태평양전쟁 중이었고 우유판매는 배급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유아와 어린이 병약자들은 영양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라 우유가 필요했고 이에 단속과 통제가 강화돼 1944년 5월부터는 우유등록제를 실시해 우유가 필요한 사람은 의사 진단서를 첨부해 경성부 총력과에 신청서를 내야했고 심사결과 선정이 되면 우유배급증명서를 발급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낙농은 일본인 소비자들을 위한 일본인의 낙농이었다.

△한국전쟁 전후=1945년 해방으로 경성부가 서울시로 바뀌면서 ‘경성우유’가 아닌 ‘서울우유동업조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중심이 되어 일본인을 상대로 경영되던 상황에서 갑자기 낙농 자본과 기술을 가진 일본이 물러나자 소비시장이 1/6 이하로 위축되는 등 조합 경영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또한 3년 동안 끌어온 한국 전쟁은 국내에 그나마 남아있던 낙농기반을 붕괴시켜 1000마리에 이르는 젖소는 종전 후 289마리로 격감되었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 쓰던 우유병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대부분 깨지거나 없어져 구하기 힘들어 시중에서 구하기 쉬운 맥주병을 사용했다.
특히 전후 국제원호단체들과 미국의 정책적인 잉여농산물의 지원으로 국내에는 갑작스럽게 많은 양의 밀과 옥수수 면실유, 분유, 버터, 치즈 등 미국 농축산물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시유 판매가 전부였던 서울우유동업조합은 분유가 시중에 나돌면서 판매 감소로 원유를 폐기하기에 이르고 조합원들에게 원유 납유 중지조치가 수시로 이뤄지면서 1957년에는 중지일수가 연중 46일이나 돼 조합원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오리온제과가 1956년 8월 출시한 밀크카라멜이 대 히트를 치면서 해태와 크라운에서도 밀크카라멜 생산에 적극 나서 우유 비수기에도 원유 부족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호황을 이뤄 안정적인 성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서울우유협동조합 시대=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5․16 혁명 세력의 계속된 경제개발 계획으로 농협협동조합법이 새로 공포 시행됨에 따라 서울우유동업조합은 1961년 12월 31일부로 해체되고 1962년 1월 23일 서울우유협동조합이 출범하게 됐다.

1961년 5월 유지방의 소화를 돕고 지방이 뜨는 부유 현상을 없애기 위해 균질기를 도입해 6월 1일부터 선진화된 고급 균질우유를 생산하고 1962년 3월 정부의 적극적인 낙농장려 정책지원 속에 전근대적 중량교 공장이 건설돼 1963년 2월부터 연유생산을 시작했다.

1965년 5월에는 자체 기술로 국내 최초의 아기분유인 ‘서울분유’를 출시하고 1962년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서울우유제품 전용 유리병우유를 선보였다.
1972년부터는 삼각포리 제품이 생산되고 초고온순간살균법이 도입됐다.

1975년에는 용인 공장, 1984년에는 양주공장, 1989년에는 안산공장이 준공됐으며 1989년 1월 기술연구소가 개소돼 지금까지 유가공 관련 연구와 제품 개발 등을 진행하고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서울우유에 의해 최초로 실시된 우유 학교급식은 1964년 국가보조가 없어 중단되었다가 초등학생은 1980년부터, 중고생은 1987년 9월부터 보조금을 지원했고 초등학생 중 생활보호 대상자는 비용부담 없이 전액 정부 예산으로 우유급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우유 소비 촉진에 일조했다.

1984년 4월에는 집유하는 모든 목장에 원유 냉각기를 설치하고 탱크로리 집유를 실시, 콜드체인시스템을 완비했으며 1985년 11월에는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제품 공식 후원업체 조인식을 갖고 성공적인 대회를 치러냈다.

1990년대에는 생산성 향상과 물류합리화 등이 추진되고 1993년 6월에는 멸균 우유 공장이 준공되었으며 1993년 8월에는 리이브의 홍콩 수출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말 IMF를 맞으며 우유시장은 위축되었고 위기 극복을 위한 우유소비홍보캠페인을 적극 진행한 바 있다.

1998년 5월, 정부가 유가공품 중 우유, 발효유, 가공치즈, 자연치즈를 HACCP 적용 품목으로 지정한 후 서울우유는 1998년 6월 단일품목으로 우유, 발효유, 가공치즈를, 양주, 용인, 안산 공장에서 각각 HACCP 인증을 받았다. 이후 1999년 8월 우유, 발효유, 가공치즈, 자연치즈 중 각 공장에서 인증 받지 못한 품목과 안산공장의 자연치즈를 추기로 인증 받아 유업계 최초로 농림부에서 지정한 4품목을 전 공장에서 HACCP 인증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2002년 5월29일에는 조합의 우유 판매량이 200㎖기준으로 일 1015만개를 넘어서면서 1000만개 판매 시대를 개막하게 됐다. 2005년 10월에는 하루 250만개(200㎖기준)에 해당하는 500톤 처리 규모의 거창 공장이, 2007년 3월에는 거창공장 내에 치즈 전문 생산공장이 준공돼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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