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경 변호사·법무법인 호율
‘슬픔의 5단계(five stages of loss & grief)’라는 심리학 이론이 있다. 큰 슬픔이나 상실에 직면했을 때 ①처해진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 ②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단계 ③좀 더 빨리 손을 썼으면 어떨까 하는 등의 후회를 느끼는 단계 ④우울을 느끼며 ⑤불가피한 일이라며 수용하는 5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을(乙)의 눈물을 닦아 주겠습니다”라는 취임 소감을 얘기하며 가맹점 거래 문제 해결을 위해 공정위의 행정력을 총동원하겠다고 선포한 이후로 프랜차이즈 업계가 보여준 태도는 위 5단계를 연상케 한다.
먼저, 가맹사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프랜차이즈 업계는 모두 다 죽는다고 난리를 치다가 우리가 진작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거쳐 이제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아 자정안을 내놓는 수용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는 지난 10월 27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자정실천안을 발표했다. 자정안 중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은 ‘가맹점사업자단체’ 구성이다. 앞으로 가맹점 수가 100개 이상 가맹점을 보유한 가맹본부는 가맹점주들의 협의체인 가맹점사업자단체를 구성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 내에 ‘필수품목지정중재위원회’를 만들어 반드시 필요한 물품만 가맹본부로부터 필수적으로 공급받도록 하겠다는 방안을 담았다. 이어 2019년까지 ‘피해보상 공제조합’을 설립해 본부의 도산 또는 재정악화 등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점주를 보상하는 방법을 찾겠다고 밝혔다. 프랜차이즈 등록 요건을 ‘2개 이상의 직영점, 1년 이상 운영 업체’로 강화하겠다는 방안 등도 포함됐다.
한편 이러한 자정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크다. 가장 큰 우려는 “구속력 없는 권고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自淨(자정)이라는 말은 (비리 따위로)부패된 조직이 어떤 조치를 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淨化)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외부적 강제력이 없는 게 당연하다.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가 앞으로 스스로의 자정안을 지키지 못할 경우 이에 대해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부터 미리 “자정안을 지키지 못할 경우 법적으로 처벌하지 못하니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은 너무 식상하고 피상적이다.
오히려 이번에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가 내놓은 자정안의 내용은 나의 예상을 뛰어 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한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된다. 다만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의 자정안이 비회원에게 적용되지 않는 점은 어쩔 수 없이 우려 된다. 프랜차이즈 소송을 많이 하는 변호사로서 메인 스트림(주류)의 테두리 밖에 있는 소규모 가맹본부가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업체들은 가맹점주와 문제가 생겼을 때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쉽게 시인하거나 조용히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소규모 가맹본부들은 가맹점주들과 문제가 생기면 아예 가맹본부를 없애거나 파산·회생 등 탈법적인 방법으로 책임을 면하려는 모습을 많이 본다.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의 자정안에 이견이 있는 가맹본사는 협회 탈퇴를 통해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협회 회원으로서 모범 규정을 실천하고 있는 가맹본부보다 그렇지 않은 가맹본부를 더 세심히 보겠다”라고 말했다.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가 발표한 자정안에 무게를 실어주는 발언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자정안을 계기로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는 우리나라 가맹사업의 미래를 이끌 중요한 역할을 떠맡은 셈이고 그 존재감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자정안을 마련한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에 기대와 격려,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