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謝過)의 세태만상(世態漫想)
사과(謝過)의 세태만상(世態漫想)
  • 최종문 우양재단 이사장, (전)전주대 교수
  • 승인 2021.03.23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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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의도와 달리 제 말씀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국민이 있다면 죄송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유 불문, 손해를 입었거나 심적 고통을 겪으신 국민께 정중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둘 다 흔히 쓰여서 귀에 익은 사과 말이나 글이다. 

얼핏 듣기엔 제법 근사하고 점잖다. 하지만 필자의 귀에는 진정성 있는 사과로 들리지 않는다. 어물쩍 사과했다는 기록을 남겨보려는 유체이탈(幽體離脫)형 사과로 위선의 수사(修辭)로 들릴 뿐이다. 그 내용을 살짝 뜯어보면 말하는 이의 고약한 심사가 그대로 읽힌다. ‘당초 의도와 달리’, 또는 ‘이유 불문’이라니 이를테면 ‘그런 뜻으로 말한 것도 아니요,’ ‘손해입거나 고통받을 일이 아닌데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하니 억울하다’는 심사의 슬쩍 내비침이 아닐까? ‘있다면’이라는 가정법은 피해자의 실존에 대한 잠재적 의구심의 표출이다.

‘죄송합니다’ 한 마디면 될 것을 ‘죄송하단 말씀’으로 한 박자 늦추고 ‘말씀드린다’라면 될 일을 ‘드리고 싶다’, ‘전합니다’라며 두세 템포 더 늦추고 얼버무리니 은근슬쩍 물타기 꼼수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본인 귀책 사유의 잘못에 대한 사과는 당연한 이치요 아름다운 덕목이다. 하지만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뜻하지 않은 실언이나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웬만하면 그냥 없었던 일로 지나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거늘 하물며 사과 당사자가 힘 있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일진대 사과는 진짜 꾸어서는 안 될 악몽, 겪어서는 안 될 재앙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지 않는 게 사과다.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통과의례는 더욱 아니다. 진정성이 담겨야 상대방에게 접수 가능, 수용 여부 심사대상에 포함될 수 있는 까칠한 덕목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아직 그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 

최근에도 국회를 중심으로 벌어진 갖가지 정치적 갈등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적잖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대 당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요구가 어김없이 쏟아지곤 했다. 하지만 솔직하고 진정성이 묻어나는 사과 뉴스는 아직은 별로다. 여야 불문 모두 그렇다. 다만 결이 다른 대국민(對國民) 사과는 드물게나마 이뤄졌다. 하지만 무늬만 사과요 내용은 변명과 둘러대기, 책임 전가와 물타기, 진영논리와 꼬리 자르기 혐의가 따르는 영양가 없는 수사만 어지럽게 쏟아졌다는 느낌이다.

더러는 대국민 사과를 일시 면피용으로 활용하거나 자신의 억울함을 에둘러 호소하기 위한 전략적 방편으로 삼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부적절하고 불성실한 대국민 사과 내용과 형식이 다수 국민의 공분으로 이어지며 졸지에 공개적 사퇴압력 대상자로 추락한 고위 공직자들도 있다. 안면몰수, 체면 불고의 버티기 전략으로 급속도로 망가지는 VIP급 공직자도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과의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 부족과 사과의 기교적 측면이 정보/지식화 시대의 전개와 함께 문화적 측면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해서 답답하고 안타깝다.

이제 이 글의 맨 앞부분의 기교 중심의 2개 예문을 사과의 기본 원리와 요즘의 문화화 추세를 반영한 필자 스타일의 사과 예문으로 바꿔 제시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한다. 
‘저의 짧은 생각과 언행으로 고통을 겪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저는 그 책임을 통감하고 분에 넘치는 이 직을 물러나겠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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