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계, “수입 소고기 무관세… 농가 줄폐업” 강력 반발
정부가 물가 안정 대책으로 내놓은 무관세 정책이 밥상물가에는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관련 업계에 역효과를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고(高)물가 현상이 지속되자 정부는 지난 8일 제1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열고 이달부터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분유, 커피 원두, 주정원료, 대파 등 7개 주요 먹거리 품목에 대해 할당 관세 0%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는 정부가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를 발표한 지 40일 만에 내놓은 추가 대책이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통해 수입 소고기 10만t에 대해 할당 관세 0%를 적용하기로 했다. 현재 수입산 소고기에 대한 관세율은 40%지만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미국과 호주산 소고기에는 각각 10.6%, 16%의 관세를 매기고 있다. 할당 관세 0%를 적용하고 있는 돼지고기에 대해서는 대상 물량을 기존 1만t에서 3만t으로 확대한다. 닭고기 관세도 현행 20%~30% 수준에서 할당 관세 0%를 적용할 방침이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품목의 관세를 낮춰 치솟은 물가를 안정시키고 서민 부담을 줄이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식품·외식업계에서는 무관세를 적용하더라도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면 결국 밥상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실제로 지난달부터 수입 돼지고기 물량 대부분에는 할당 관세 0%가 적용됐지만 이는 온전히 소비자물가에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노원구의 한 대형 할인마트 관계자는 “이미 크게 오른 국제 축산 물가와 달러 환율 등의 영향으로 관세 인하분이 소비자물가에 그대로 반영되기는 쉽지 않다”며 “앞으로 시행하는 수입 소고기 할당 관세 역시 유통단가나 생산단가는 낮아질 수 있어도 소비자물가 인하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이번 대책이 오히려 가격 인상을 어렵게 만들었다며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종로구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A씨는 “정부가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물가 안정 대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실제로 장사하면서 물가 인하를 체감한 적은 없다”며 “오히려 원재료비가 끝을 모르고 올라 올 하반기에는 메뉴 가격 인상을 고려했는데 정부의 대책으로 눈치만 보게 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축산업계의 반발도 거세다. 이들은 이번 정책에 대해 전 세계 곡물 가격 폭등으로 사룟값 부담이 커진 농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조치라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국한우협회는 지난 8일 성명서를 통해 “수입산 축산물에 대한 무관세가 적용된다면 국내산 축산물의 가격은 곤두박질치고 농가들의 줄폐업이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오직 물가와 가격 잣대로만 맹목적 수입을 장려하는 것은 밥상물가 진정을 빌미로 한 식량과 국민건강 주권포기 정책”이라며 “물가 안정 기치 아래 축산 농민들의 생존권은 도외시하고 있다. 죽음 일보직전에 내몰린 축산 농민들을 살릴 근본대책을 즉각 마련하고 수입축산물 무관세 정책을 전면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축산업계의 반발속에서 정책을 주관하는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정황근, 이하 농식품부)는 지난 13일 박범수 차관보 주재로 주요 소고기 수입 및 가공·유통업체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수입 소고기 할당 관세 운영방안을 협의했다. 박범수 차관보는 수입 소고기 할당 관세 운영방안을 설명하고 현장 업계 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한국육가공협회·한국육류유통수출협회 등 관련 단체를 비롯해 하이랜드푸드·한중푸드 등 수입업체, CJ제일제당·동원홈푸드·대상네트웍스 등 가공업체,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주요 유통업체가 참여했다.
박범수 차관보는 “수입 소고기 할당 관세 적용은 물가 안정을 위해 추진되는 조치인 만큼 소비자 등이 그 혜택을 체감할 수 있도록 관세 인하분이 가격에 즉각 반영되도록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회의에 참석한 한 업계 관계자는 “관세 인하 혜택이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소비자들이 주로 접하는 신선육 가격 등에 대해서도 관세 인하분의 일정 수준만큼 가격 인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가격 인하 수준은 유통 비용 및 도입단가 등을 고려해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농식품부는 이날 반발하는 축산업계를 겨냥해 축산농가 비용부담 완화 방안을 발표했다.
농식품부는 우선 사료구매자금 상환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올해 한시적으로 사료구매자금을 저금리로 지원받은 농가의 상황 조건을 ‘2년 거치 일시상환’에서 ‘3년 거치 2년 분할상환’으로 개선해 대출금을 최장 5년에 걸쳐 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수입 조사료(건초나 짚 등 섬유질이 많은 사료) 할당 물량을 늘려 가격 부담을 낮추기로 했다. 아울러 한우·돼지 도축 수수료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