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과 일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립과 갈등, 증오와 저주, 술수와 책략의 횡행 난무가 극심하다.
4세기 전 T. 홉스(1588-1679 영국)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가설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부 공감을 불러일으키니 안타깝다. 소통의 갈급함을 외치는 목소리도 드높다. 나 자신보다 타인의 견해를 경청하는 사람은 만만한 대상으로 격하 경시되고 자기 뜻만 내세우는 이에겐 ‘소신파’ 타이틀에 리더십까지 덤으로 얹는 풍조가 우세 종으로 터 잡은 형국도 비정상이다.
이처럼 자기를 내세우는 입은 성하되 자신을 낮추고 남의 이야기를 듣기에 열어둔 귀는 퇴화할 때 필자는 라마르크(1744-1829. 프랑스) ‘용불용설用不用說’을 비유적 사례로 즐겨 인용한다.
‘만인 투쟁설’과 ‘용불용설’이 일시적 단발성이라면 개인적 착시현상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원숭이 두창균의 동시유행 걱정을 떠올리면 장기화·토착화 우려도 만만찮은 게 사실이다. 이 같은 현상의 일상화, 만성화 우려가 하필이면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요 음악과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대국으로 터잡은 대한민국에서 실시간 전개되니 안타깝고 씁쓸하다.
황희(黃喜1363-1452), 이원익(李元翼1547-1634) 등과 함께 조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어느 날 조회 후 퇴근길, 말 앞을 가로질러 지나는 한 여인을 하인이 밀쳐내어 땅에 넘어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정승이 하인을 심하게 꾸짖기를 “내가 정승이니 백성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면 내 수치다. 길 가는 사람을 엎어지게 한 것은 심한 잘못,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훈계했다. 그리고 집에서 외부손님과 환담하고 있는데 피해 여인은 정승의 집 앞 언덕에 올라가서 매섭고 격렬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머리 허연 늙은이(두백노물 頭白老物)가 종을 풀어 길 가는 사람을 넘어지게 했으니 네 죄는 귀양보내야 마땅하다.” 손님: “저 여자가 욕설을 퍼붓는데 대상이 누굽니까?” 정승: “이 집에서 ‘두백노물’이 나 말고 누구겠소?” 손님: “왜 내쫓지 않고 내버려 둡니까?” 정승: “내 잘못이니 그가 욕설로 분을 삭이게 함이 옳소” (성낙훈, 민병훈 <한국명인 언행선>264-265쪽 진명.1974)
이항복은 절대 왕권 조선의 제2인자급 정승이었지만 피해 여인의 관점과 패러다임으로 바라보고자 생각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하인의 뒤, 또는 옆에 자기가 있음을 인정하고, 마침내 피해 여인에 의한 명예훼손 형 비방과 욕설까지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는 욕설뿐 아니라 여인의 정서까지도 수용할 넓은 도량과 세련된 ‘듣는 매너’ 까지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문제해결에 유익한 사람은 입 보다는 귀가 성해서 내 얘기보다 남의 얘기를 잘 듣는 사람이다. 내 주장 우선의 ‘설득적 방법 (Persuasive Method)’에 길들인 사람보다 남의 이야기 듣기 우선의 ‘적극적 경청법 (Active Listening)’이나 ‘공감적 경청법 (Empathic Method)’(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김영사. 1994)에 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가슴으로 듣고 귀로 말한다’, 황량하고 살벌한 이 시대 세상 풍조를 녹여 줄 하나의 대안, 또는 이른바 ‘소통 문화 업그레이드’의 한 방법론으로 삼아 볼 만하지 않을까?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꿔야 옳다. 부인 못할 오늘의 시대 정신이요 경세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