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龍)의 식사
용(龍)의 식사
  • 김철원 한국방송대 관광학과 교수, 외식테라피연구소장
  • 승인 2023.12.26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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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아온다. 이번 새해는 ‘푸른 용의 해’라고 해서 특별한 기운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용은 12간지 중 유일하게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아시아 문화에서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중요한 생명체로 여겨졌으며, 특히 절대권력과 왕권을 상징해 ‘임금’을 의미했다. 그로 인해 궁중에서도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顏)이라 했고, 임금의 눈물을 용루(龍淚)라고 했다. 그렇다면 임금의 식사는 뭐라고 했을까. 

조선시대 임금을 위해 차리는 밥은 ‘수라(水剌)’라고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상차림을 수라상이라고 한다. 수라는 고려 말기에 유래된 몽골어 ‘슐라(음식을 의미)’에서 변형됐다고 전해진다. 하루 총 다섯 차례 차려지는 임금의 식사에서 수라는 오전 10시 무렵 ‘조수라(朝水刺)’, 오후 5시에 ‘석수라(夕水刺)’라 하여 두 번 차려졌고 이외에 이른 아침 미음, 죽 등을 올리는 ‘초조반(初早飯)’과 점심의 ‘낮것상’ 그리고 밤에 내는 ‘야참(夜站)’ 등이 올려진다. 

수라상의 기본 구성은 12첩 반상으로 찬은 조리법과 재료가 겹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이다. 수라상의 재료는 조선 팔도의 특산물인 진상품으로 올라온 음식을 고루 담는다. 여기에는 임금이 식사하면서도 나라 안팎의 사정을 살핀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의 진상품이 빠지거나 줄었다면 그 지역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반 수라상은 궁궐 수라간 내소주방(內燒廚房)에서 준비했고 여기에는 전국 각 지방에서 진상 받은 특산물이 모였다. 최고의 실력을 지닌 궁궐 조리사들은 최고의 식재료로 임금의 식성을 맞추고 의식동원(醫食同原)에 입각해 만든 음식을 수라상에 올렸다.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차려진 수라상은 대원반·곁반·책상반 등 모두 3개의 상차림으로 이뤄진다. 대원반은 왕 앞에, 소원반은 기미상궁 앞에, 책상반은 수라를 시중드는 수라상궁 앞에 놓인다. 조선시대 궁중에는 임금의 식사를 담당하는 기미나인과 수라상궁이 있었다. 임금이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기미(氣味)’라는 절차를 거쳤는데 기미나인이나 수라상궁이 임금의 식사 전에 음식 일부를 자신이 먼저 먹어본 후 이상이 없으면 비로소 임금이 식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임금의 수라상이라고 해서 산해진미가 넘쳐나는 호화로운 밥상은 아니었다. 연회를 제외한 일상식은 오히려 검소할 정도로 모범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라상은 12첩 반상으로 그 양도 엄청나게 많아서 왕 혼자서는 먹을 수 없는 양인데, 이는 왕이 식사를 마친 뒤 물린 상을 받아 왕 밑의 신하들이나 궁중 나인들이 먹었던 ‘물림상’이라는 풍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물림상은 신분의 차가 있는 식사 자리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해 정성껏 차리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배려해 식재를 적당히 남겨 모두가 먹을 수 있게 베푸는 상호 배려의 문화이고 음식을 남기지 않는 친환경적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나라에 큰 흉년이 들거나 전쟁 등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는 임금이 자발적으로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고기를 올리지 않게 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직도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갑진년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자들이 왕의 식사를 준비하듯 다양하고 좋은 제철 식재료를 엄선하고 정성껏 준비해 제맛을 내도록 하고, 식품 안전에 ‘기미(氣味)’ 하듯 철저할 것이며, 식사하는 자들은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거나 사치하지 않으며 주위와 나눌 줄 아는 품위를 지녀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음식을 이리 대한다면 그대가 갑진년 새해 올바른 먹거리를 주도할 진정한 왕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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